응답하라, ‘안녕’한 세상

2014-01-07     남도인터넷방송

[기고/남도인터넷방송] 최근 들어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두 가지 현상이 있다. ‘응답하라~’라는 TV프로와 ‘안녕들 하십니까?’로 시작되는 대자보 열풍이 바로 그것이다.

‘응답하라~’로 시작되는, 이 드라마는 1990년대 중반 20대를 보낸 지금의 필자 세대에게 큰 인기다. 그 시절 유행했던 노래와 소품들이 디테일하게 재현되면서 ‘정말 그랬지, 그랬었어’라는 감탄사를 연발하게 만든다. 그리고 착각 속에 빠져들게 한다.

우린 그때 ‘참 행복했었다’고 말이다. ‘응답하라~’는 이른바, 기억하고 싶은 일들만 골라서 불러내는 일종의 주문과도 같다. 상당히 사실적으로 그려진 판타지인 셈이다.

제한된 세대의 ‘추억’을 자극하는 ‘응답하라~’와는 달리, ‘안녕들 하십니까’는 세대를 넘나들며 그들의 ‘현재’를 어루만진다. 각종 민영화에 대한 불안함, 유례없는 취업난, 여전히 답보상태인 노동자의 권익 등 한 청년이 낱낱이 열거한 불합리한 사회 현실에 한명 한명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기자는 진실을 외면한 언론에, 주부들은 보육 시스템의 미비함에 대해, 고교생들은 입시경쟁이 양산하는 폐단에 대해 말을 한다. 굵직한 담론에서부터 이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작은 소통과 고백까지 현 사회의 이면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고 있다.

 ‘안녕’하지 않은 현실에 적극적 관심을

하지만, 이렇게 확산된 소통의 공간에서도 그 ‘안녕하지 못한’ 처지를 전달할 방법에 목마른 분들이 계시다. 밀양 지역의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다 유명을 달리하신 어르신과 고향을 지키고자 몇 년 동안 긴 싸움을 이어간 지역 주민들이다.

70만 볼트가 넘는 초고압 송전탑이 밭 한가운데 세워지면 주변은 사람도, 동물도, 초목도 살 수 없는 환경이 된다고 한다. 어느 할머님의 말씀대로 “고향”은 돈으로 보상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국가의 전력수급에 도움이 되는 국책 사업이라 할지라도, 일부 지역민의 건강을 담보로 진행된다면 이를 국책이라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다산은 당대 사창법(社倉法) 시행의 불합리성에 대해 「하일대주(夏日對酒)」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 한 바 있다.

...
사창법 한번 만들어 진 뒤 社倉一濫觴
만 목숨 뒹굴며 구슬피 우네 萬命哀顚連
빌려주고 빌리는 건 양쪽 다 원해야지 債貸須兩願
억지로 시행하면 불편이 오네 强之斯不便

이조 후기 농민을 위해 시행했다는 사창법은 결국 환곡의 문란으로 이어졌고, 이 하중은 그대로 농민들이 떠안아야 했음을 시(詩)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다산이 이 시에서 강조한 것은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였다.

그리고 이는 지금 밀양지역 송전탑 문제에서 가장 필요한 대안이 무엇인지 제시한다. 송전탑 건설의 근본적 이유가 정말 전력 수급의 부족으로 인한 필수적 선택이었는지 그 진위(眞僞) 여부는, 여기서 판단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전력의 대부분을 소비하는 주체이자 편안한 도시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는, 이 상황에 미약한 관심이라도 두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안녕들 하세요’가 이념과 진영의 논리를 떠나 ‘사람다운 삶’에 초점이 맞춰진 소통과 고백이라면 이 사안, 그리고 이와 유사한 일들에 대해 인지하고 관심을 두는 것, 최소한의 부채감을 느끼는 것은 거의 의무에 가깝지 않나 한다.

두보(杜甫)는 출정하는 병사들의 호기로움보다 그들을 보내는 부모, 친지들의 하늘을 찌를 듯한 곡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다산은 아름다운 어촌 풍경의 행간에서 세금으로 고통받는 어민의 마음을 읽어냈다. 이들만큼은 못할지라도, 현 상황에 대해 이해와 관심으로 ‘응답’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인간들의 이기적 욕구가 올바른 사회적 합의에 의해 제어되어야 좀 더 사람답고 안녕한 삶의 기반이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고민해 보는 세밑이다.

글쓴이 / 김영죽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
성균관대 한문학과 강사